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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병
: 혈관부터 시작해 몸에 꽃이 피는 희귀병. 유효한 치료법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발병하면 진행이 가속되어 1주일 내로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병의 진행을 늦추려면 사랑받지 않고 고독하게 지내야 하며, 사랑을 받으면 꽃이 몸을 순식간에 갉아먹어들어가 사망하게 된다.
" ···선배, 왔어? "
-띠, 띠.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계들이 규칙적으로 소음을 내뱉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살갗 특유의 향 대신 지독한 장미의 향이 죽음을 머금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선배에게는 예쁘게만 보이고 싶었는데, 아쉽네. 가벼운 농조를 띈 말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가, 서늘한 침묵에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 나도 몰랐는데, 희귀한 병이 있었대. "
현우는 괜찮다더라, 다행이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무시하고서, 붉어지는 눈가를 외면하고서, 억지로 안도의 말을 내뱉었다. 사랑, 죽음, 꽃···. 눈을 깜빡이면, 허공으로 흩어진 숨결이 모여 병과 관련된 낱말을 만들어냈다. 있지 선배, 나 사랑을 받으면 죽는대. 내뱉지 못할 말들을 혀 밑에 숨겼다가, 삼키어본다. 조각난 자음과 모음이 목구멍을 찌르고, 혈향이 향긋하게 피어날 때쯤, 나는 눈을 감았다.
†
사랑으로 태어났으나 사랑받지 못할 운명을 목에 걸고, 혈관 속 씨앗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를 보며 부러움의 비를 내려 꽃을 키웠다. 아아ㅡ 신이시여,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뜬 갓난아이에게 어떤 극악무도한 죄가 있었기에, 어째서 평생을 부러워하다 죽게 만드시나요. 이리도 비참하게 만드시나요···. 낡아빠진 무대 위에서, 평생 사랑받지 못할 소녀가 외치는 소리는 거대하였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거대하기만 한 소리는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졌다. 텅 빈 무대에 주저앉은 소녀는 어떤 표정이었던가. 울었던가, 혹은 웃었던가.
사랑받고 싶었으나, 살고 싶었다. 넘어진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며, 서로 울고 웃고 하는··· 그런 평범한 삶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뻗어진 손을 내치며 쓴소리를 내뱉었다. 깊은 관계를 차단하고, 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벽을 쌓아버렸다. 창문을 만들지 않았기에 어두운 벽 안에서, 홀로 앉아 설움을 삼키며 살아가야 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어째서.
†
아가씨.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항상 선배가 있었다. 가벼운 웃음소리, 두근거리는 심장, 공간을 가득 채우는 푸른빛···.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속절없이 웃어 보일 때면, 원망스러운 씨앗이 피를 타고 흘러 심장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심장에 가득 고인 감정을 먹더니, 피어버린 푸른 장미가 감정의 이름을 알렸다. 내가 원하고, 또 증오하는··· 사랑. 사랑이 날 찾아왔구나. 눈가에 흐르는 물줄기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세상의 색채가 뚜렷해졌으나, 곧 스러질 것이었다. 아아, 아ㅡ. 새어 나오는 진한 장미의 향이, 무척이나 역했다.
아무도 없는 방, 푸른 펜을 들고 거울에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삐죽, 선이 튀어나갈 때마다 입술을 물어뜯었다가도, 결국엔 그림을 완성하고서는 펜을 내던졌다. 이게 뭐야···. 전혀 안 닮았잖아. 옅게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있었으나 서글펐다. 누가 보면 미친 줄 알겠어. 작게 중얼거리며 차려입은 옷을 정돈하고, 거울 앞에 섰다.
" 선배. "
" 우리···. 우리··· ···. "
" 그만, 만···나요. "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뱉은 말이 둥실 떠올랐다가, 목적지를 찾지 못해 사라졌다. 고인 물기를 속없이 떨어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푸른 펜으로 그려진 네가 있었다. 그림 실력이 없어, 색이 붉었다면 누군가를 저주하는 중이라 오해받을 정도였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네 온기까지 보였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이별을 통보했다. 머뭇거리는 숨이 고르게 될 때까지, 흐르는 눈물이 멈출 때까지,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저 혼자만 감정을 품고 있을 때 끝내야 했다. 사랑했으나, 죽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이 감정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는데, 하고 후회의 말을 내뱉으려다 생각나는 너와의 추억에 저절로 닫히는 입이었다.
저도 평범한 이들처럼 구애하고 싶었다. 마음을 내보이고, 마음 편히 설레며, 사랑받고 싶었다. 허나 지금 꼴이 어떠한가. 기껏 차려입은 옷은 물에 젖어 얼룩이 졌고, 잔뜩 달아오른 얼굴에 열감이 맴돌았다. 쉬어버린 목은 거친 소리만을 내뱉었고, 쿵 쿵 거리는 심장은 헤어짐을 말하지 못하리라 예고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억지로 감정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다가 보인 것은, 흉한 저의 모습이었다. 아, 그래.
" ···우리, 그만하자. "
눈에 보인 것은 푸른 존재가 아닌, 그 뒤의 것이었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와 비를 내렸고, 한껏 사랑을 머금은 꽃이 피어났다.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장미의 향이 퍼져 나왔다. 옆에 있던 이불자락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니, 나오는 것은 푸른 꽃잎이었다. 내가 미치긴 미쳤나 봐. 거울 속에는 푸른 꽃잎이 존재하지 않았다.
†
꿈을 꿨다. 너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이는 꿈을. 꿈속의 나는 걱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이 웃고 있었고,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는 것을 즐겼다. 꿈에서 깼을 때 얼마나 허무했는지. 한 번 흘러나온 감정은 끝을 몰랐고, 두려움을 용기로 속여 저의 속을 내보였다. 점점 장미의 향이 진해지는 것을 보니, 얼마 가지 않아 저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건, 심장의 멈춤을 의미했다. 제대로 된 데이트도 하지 못하고, 입도 맞추지 못할 것이다. 저는 자연적으로 피어날 수 없는 푸른 장미이니,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고 스러질 것이었다. 그래도 되었다, 네 마음을 확인했으니. 이 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저의 이기심이었다.
미안해, 선배. 내가 큰 상처를 주는 건 아닌가 겁이 나. 하지만, 내가 선배의 기억 한곳에 깊게 각인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선배. 나를 원망해도 되고, 잊으려 해도 돼. 선배 덕분에 행복했어. 평생 알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랑을 알았고, 받지 못할 사랑을 받았으니. 난 행복해, 선배. ···그래도, 선배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아쉽네.
선배,
" 사랑해. "
푸른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이었으나, 동시에 불가능의 극복을 뜻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사랑을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저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저의 목을 조를지라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푸른 장미가, 푸른 바다를 보며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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