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거/다냥]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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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거, 이리 오렴. "
" 선생님, 다냥이는요? "
" 물론 다냥이도 잘했지. 하지만 지금은 1등만 나가는 거란다. "
" ···1등. "
커다란 무대 위로 조그마한 아이가 떠밀렸다. 큰 대회였기 때문인지 처음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아이는 붉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지도 못하고 어른들의 찬사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섰다. 이제 10살은 되었을까, 어린아이 답게 짧은 손가락은 굳은살 하나 없이 말랑했다.
" 저 아이를 봐요, 손에 굳은살 하나 없어요. "
" 들어보니 피아노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네요. 다른 아이들은 몇 년이고 연습해서 나온건데··· "
" 신이 내린 재능이네요. "
아이는 귀가 밝았다. 관객에게 인사하고, 뒤돌아 자신과 경쟁했던 아이들에게 허리 숙인 아이의 눈이 수많은 손으로 향했다. 저 아이는 새끼 끝에 굳은살이 있네. 저 아이는 손 끝이 딱딱해보여. 그 옆은 밴드를 붙였네, 굳은살이 생기려는 걸까? 아이는 허리를 곧게 피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말랑해보이는 손은, 자신이 피아노를 얼마 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재능, 이게 재능인걸까? 아이는 무대 밖으로 걸어나가며 제 누이의 손을 보았다. 저와 같이 말랑한 손, 그러나 서있는 위치가 달랐다. 아이는 입에 다디단 것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 안이 너무 달아, 쓴 약을 입에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내 옆에 다냥이가 함께 있었더라면···. 아이는 입 안의 단 것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씁쓸함이 가시고 오로지 단 맛만 느껴지는 감정. 아이는 이것을 같이 상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라 생각했다.
" 오빠. "
" ···다냥아. "
아이는 제 누이의 시선이 손에 든 트로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혹여 감정이라도 상할까, 서둘러 등 뒤로 트로피를 감추는 아이의 입가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가 가득했다. 오빠, 멋있어! 저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활짝 웃어보인 누이가 저를 향해 양쪽 엄지를 내보였다. 아이의 눈이 또다시 손가락으로 향했다. 나와 같은 말랑한 손, 그리고···
아이는 고맙다고 말하며 제 누이를 꽉 껴안았다. 누이의 손이 제 등을 덮고, 제 팔은 누이의 허리를 감았다. 누이의 따뜻한 손이 일정한 박자로 제 등을 두드리자 등에서 온기가 피어올랐다. 제 손바닥은 금속 특유의 서늘함이 기어올라 차게 식었는데, 누이의 손은 따뜻함이 그대로다. 속 깊은 곳에서 행복을 가득 담은 질척한 감정이 혈관을 타고 온 몸을 휘감았다.
나, 행복해. 오빠가 행복하니까 나도 좋아. 우리 닭꼬치 사먹을까? 좋아! 아이의 귀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눈에 저와 제 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남매는 사이가 좋네, 귀여워라.지나가듯 작게 흘린 말을 들었다. 아이는 트로피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제 누이의 손을 잡으며 환히 웃었다.
나와 달리 따뜻한 손. 그것이 좋았다.
†
분명 좋았는데
†
" ···피아노라. "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책상을 두드렸다. 지구에서 제일 화려한 세상, 그 중에서 제일 화려한 곳. 그곳에 네가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 제일 활기찬 세상, 신조차 반짝이는 것이 없다면 내려다볼만큼 가장 탐욕적이고 천박한 곳. 그곳에 우리가 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세계 최고라 불리는 카지노의 중요 일정이 적힌 종이가 힘없이 펄럭였다. 많은 이가 돈을 주고서라도 보려 하는 정보인데도, 그것을 바라보는 금빛 눈은 무료함에 가득 차있었다. 빛을 받아 남색으로 반짝거리는 결좋은 머리카락이 기울어진 고개를 타고 흘러내렸다.
" 중간에 들어가는 피아노 연주자, 아직 안 정했지 크루? "
다냥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가 한 남성에게로 향했다. 질 좋은 정장으로 차려입고, 손에 딱 맞는 하얀 천 장갑을 착용한 자. 직원들에게는 '이 곳'의 실세라는 소문이 가득한, 실제로는 그저 그녀에게 잡혔을 뿐인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입을 벌렸다.
" 응, 아직이야. 마침 세계에서 논다는 피아니스트가 연락을 보냈는데, 섭외할까? "
" 아니, 무시해. "
한 번 연주를 부탁하기 위해서는 천만금을 주어야 한다고 자자한 이가, 직접 연락을 보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무시하라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락을 취하는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 그러면··· 새롭게 모집 공고를 내볼까? 지원자들이 넘쳐날텐데. "
" 말고, 다거한테 부탁하자. "
멈칫, 하고 굳었다가 빠르게 작성한 후 전송 버튼을 누른 크루가 고개를 들어 다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빤히 바라본 금빛 눈동자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게 투명했다.
" ···다거? "
" 오랜만에 다거의 연주가 듣고 싶어졌어. ···어렸을 때 생각도 나고. "
" 너··· 진심이야? "
" 문제라도 있어? "
" 그야, "
크루는 신중한 남자였다. 호텔의 이미지를 위해, 카지노에서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다냥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 여러 이유에 책임을 지고 자신을 꾸몄다. 처음으로 명품점에 가서 정장을 맞추고, 하얀 장갑을 꼈다. 매번 지나치던 뉴스들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자신의 말투를 고쳤다. 그는 그렇게 완벽한 비서가 되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지 알잖아. 아니, 그가 피아노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잖아. 평소에는 말리라고 해도 냅두더니, 갑자기 그를 왜 자극하려는 거야? 속에서 뱉지 못한 말이 꼬여 장기를 뒤틀었다. 하지만 그는 비서였기에, 다냥의 하나뿐인 친구로써, 그 모든 말을 삼켰다.
" 아니, 아니야···. 다거한테는 내가 말해놓을게. "
" 이제 다거도 벗어나야 해. 그게 우리 모두에게 이로우니까. "
손 끝으로 유리 장식을 툭 치며 장난치던 손길이 거세졌다. 유리에 비친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심해의 달을 보는 것 같았다. 크루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웃어보인 다냥이 갸우뚱거리는 유리 장식을 바닥으로 밀었다. 상당한 높이였으나, 유리 장식은 깨지지 않았다.
" 단단하네. "
" 우리도, 이렇게 단단했었는데. "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구두 끝으로 유리 장식을 툭 치자, 쩌적 소리와 함께 투명한 유리 장식 내부에 하나 둘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깨어지지는 않았다. 내부는 전부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그 겉모양만큼은 어디 하나 튀어나온 것 없이 매끈했다. ···정말, 우리 같고 마음에 들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
" 크루, 그러고보니 넌 다거를 안 피하네? "
"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
" 아니, 너랑 다거랑 성격 비슷하잖아. 보통 그러면 동족혐오가 있으니까. "
" 동족혐오라··· 글쎄. "
딱히 동족같진 않던데.
†
" 다거. "
" 응? 아, 크루 비서님. 오랜만이에요. "
질 좋은 정장에, 다냥과 같은 검은 가죽 장갑.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고급진 어휘··· 누구 하나 서로를 따라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서로 닮아있었다. 자신을 왜 불렀느냐는 듯 저를 빤히 쳐다보는 노란 눈을 보았다. 역시, 동족혐오를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누구든 저 눈을 본다면 기겁하고 도망갈걸. 크루는 익숙하게 말을 삼켜냈다.
" 회장님이― "
" 다냥이가? "
" ···아니, 이 곳에서는 마스터라는 말이 잘 어울리겠네요. "
" 마스터가 카지노 1주년 연주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셨습니다. "
보라, 그녀가 쟁취한 어느 하나 인정하기 싫어 발버둥 치는 것을. 굶주린 짐승마냥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날뛰다가, 발소리 하나 들었다고 펄쩍 뛰고 경계하는 것을. 동족이라기보단··· 그래, 포식자를 따라하는 피식자려나? 크루는 익숙하게 비웃음을 참아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길. 크루는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 후 뒤돌아 걸어나갔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못들은 척 무시하고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멍청하긴.
†
" 다냥아, 너― "
" 평소엔 슬슬 피해다니더니, 빠르네."
저물어가는 태양빛이 새어들어와 방을 붉게 물들였다. 다거의 목소리는 크루처럼 침착하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목소리였지만 크루와 다르게 여유를 품고 있지 않았다. 금처럼 반짝이고, 유리처럼 투명한 노란 눈동자 속에 다거가 갇혔다. 금이 간 유리 장식에 붉은 빛이 들어와 갈라진 틈 사이로 피처럼 흘러내렸다.
" 뭐···? "
" 모를 줄 알았어? "
거기까지 생각을 못한건지, 아니면 날 우습게 본건지. 평소와 달리 차게 식은 목소리가 다거를 향했다. 너, 그게, 무슨···. 왜 말을 못해 다거, 너도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눈을 가렸을 뿐이지.
" 알아, 네가 이 얘기에 민감한거.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잖아. 난··· 예전처럼 지내고 싶어. "
" 넌··· 아무것도 몰라. 넌, 넌···! 아무, 것도··· 모른다고. "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9살이 되던 해에 누이와 함께 피아노를 시작했다. 누이의 재능은 평범했으나, 아이는 달랐다. 아이는 빠르게 기존 아이들의 실력을 따라잡은 것은 물론, 금방 앞질렀다. 하나를 알려주면 5, 6을 아는 아이. 아이는 즐거웠다. 행복했다. 모두가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은 그 기대에 맞춰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간다. 다른 아이들의 딱딱한 손과는 달리 아직 말랑한 손은 그 재능을 보여주었다.
결국 아이는 10살이 되던 해, 5, 6살부터 피아노를 치던 아이들을 앞지르며 큰 대회에서 우승했다. 아이는 찬사를 받았다. 아이는 우월감을 느꼈다. 아이는 행복을 느꼈다. 아이는 고양감을 배웠다. 아이는 승리를 맛보았다. 아이는, 아이는, 아이는···.
아이는 흘러넘치는 재능만큼 거다란 기대를 받았다. 아이는 행복했다. 자신의 누이와 달리 트로피로 가득 찬 제 책장이 마음에 들었다. 제 누이와 달리 쓰다듬어지는 머리가 좋았다. 제 누이와 달리 기대받는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제 누이의 반짝이는 시선이 좋았다. 제 누이의 응원이 좋았고, 옆에서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렇게 아이는 점차 성장했다. 그리고 아이의 불행이 시작됐다. 하루가 지날때마다 몰라보도록 성장했던 아이의 피아노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칭찬이 아닌 호통이 날아오는 날이 잦았다. 주변에서의 기대는 여전히 높은데, 아이는 점차 추락하고 있었다. 아이 안의 영혼이 바뀐 건가 싶을 정도로, 아이의 재능은 평범 그 이하가 되어있었다.
두 로켓이 있다. 두 로켓 안에는 10의 연료가 들어 있었고, 로켓이 발사되기 위해서는 5의 연료가, 지구를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선 9의 연료가 필요했다. 선택의 지점에서 아이는 9의 연료를 지불했을 뿐이다. 아이의 재능은 무섭도록 빠르게 성장했고, 수많은 업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고작 1남은 연료로 얼마나 더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연료를 전부 소모한 로켓처럼 아이는 추락했을 뿐이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누이는, 처음부터 로켓을 발사하지 않았다. 로켓의 연료를 전부 빼와 1은 트럭에, 2는 비행기에 넣고 3은 배에 집어넣는 등 여러 곳에 투자했고, 이어 무역의 큰 주축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는 추락했고, 아이의 누이는 부상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너무나도 공정했기에 잔혹한 현실이었고, 아이는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그렇게 아이는, 다거는 점차 피아노를 멀리 했다. 아이의 누이, 다냥은 종종 그의 피아노 소리를 그리워하였지만 피아노 앞에만 스면 표정이 차갑게 굳는 다거를 기억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후에, 회복이 되었을 때. 다시 옛날로 돌아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자 마음먹었다.
다거는 뒤를 보았다. 제 뒤에 서있던 누이는 이제 없다. 다거는 옆을 보았다. 제 옆에서 저를 응원하던 누이는 이제 없다. 다거는 앞을 보았다. 제 누이는 이제 저를 훨씬 앞질러,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다거는 손을 보았다. 딱딱해보인다. 다거는 장갑을 꼈다. 다거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옛날 출전했던 대회를 생각하며 정장을 입었다. 다거는 쓰다듬이 받고 싶었다. 쓰다듬고 싶도록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겼다. 다거는 누이 옆에 서고 싶었다. 쓰는 어휘를 바꿨다. 다거는 추락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다거는 부상한 누이를 질투했다. 다거는 다시 누이를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길 수 없었다.
"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지? 피아노 연주는 불가능 할 것 같아. 알다싶이 실력이 부족하거든. "
" 네 카지노에 걸맞는 사람이 연주하는게 낫지 않겠어? "
공허하게 텅 빈 노란 눈동자가 투명한 금빛 구슬을 바라보았다. 친절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담긴 감정은 아무것도 없다. 다냥은 제 형제를 보았다. 긴 기간동안 쌓여있던 설움들이 제 깊은 속엣 울컥 거리며 목구멍을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잖아···
" ―넌 아무말도 하지 않잖아. "
" 나도, 알고 싶다고··· 왜 그러는지. "
다거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제 누이는 항상 긍정적이었으며, 밝고 활발했다. 그렇기에 저런 목소리는,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투명한 눈동자에 물이 들어차고, 높게 통통튀던 목소리가 깊게 침체되었으며, 덜덜 떨렸다. 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유도없이 피하고, 원망했던 저를 이해하려 하다니. 포용하려 하다니.
" 하, 하···. 그래, 그랬구나. 내가 다··· 망친거였어."
힘이 풀린 다리가 꼴사납게 구부러지고,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위로 올려다본 제 누이는 붉은 빛에 물들어있었으며, 무척 아름다웠다. 투명하고 올곧은 눈동자에 제가 비쳤다. 눈은 공허하고, 입술은 볼품없이 파르르 떨렸다. 이 얼마나··· 역겨운 꼴인가. 죄악감이 흘러나와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런 제 앞에, 누이가 장갑을 벗고는 손을 뻗었다.
" 망치지 않았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
" 다시···. "
다거는 장갑을 벗었다. 이어 말랑해보이는 손으로, 온기를 지닌 손으로, 제 차갑고도 딱딱한 손을 뻗었다.
구원救援하노라
구원舊怨하소서
구원[舊怨] : 오래전부터 품어 왔던 원한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책상 구석에 놓여있던 유리 장식이 도륵 하고 굴러가 천천히 낙하했다. 이어, 거대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히 조각난 유리 조각이 붉은 빛에 물들었다. 그렇게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더이상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Fin. 구원자